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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큐멘

[펌] 조선 최초의 여성의사 김점동

by 림츄 2019.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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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 위인

김점동은 1876년 서울에서 김홍택이라는 사람의 셋째딸로 태어났다.

김홍택은 여자들을 위한 학교 이화학당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딸들 중에 가장 똑똑한 셋째딸을

이화학에 보낸다. 이화학당에 온 학생들중에 아버지 손에 이끌려 온 사람은 김점동밖에 없었다고 하니

김홍택도 그 당시 사람치고 상당히 깨어있던 사람인걸로 보인다.

1886년 당시 이화학당

그렇게 10살의 나이로 이화학당에 들어온 김점동은

이화학당의 설립자인 메리 스크랜턴을 처음 보고 겁을 먹기도 했다고.

당시 서양인들이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있었고 자신을 난로에 집어던져 죽이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스크랜턴의 친절한 얼굴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고 김점동은 회상했다고 한다.

김점동은 이화학당을 다니면서 영어에 뛰어난 실력을 보였고

곧 서양인들과도 무리없이 대화할 수 있게 되고 세례를 받아 '에스더'라는 이름도 얻게 됨.

한편 스크랜턴은 조선의 여성들이 여자남자를 유별하게 여겨 의원에게 치료를 못받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하다가 '보구여관(保救女館)'이라는 여성전용병원을 세워

평소 눈여겨보던 김점동에게 통역을 맡긴다.

김점동은 보구여관의 통역을 계속 맡다가 서양인 의사가 구순구개열, 소위 '언청이'라 일컬어지는 아이를 

수술을 통해 치료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격을 받았고 미국에 가서 의학을 배우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그녀 앞에는 장애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혼인이었다.

조선에서의 풍습대로라면 여자는 십대 중후반쯤에 혼인하는게 당연했고

김점동의 나이도 16살로 혼인하기에 딱 맞는 나이.

김점동의 친척들도 점동이는 대체 언제 혼인하냐고 닦달이었고

심지어 보구여관에 찾아온 환자들도 저 처녀는 왜 혼인을 안하냐며 궁금해했긔;

결국 참다못한 김점동의 어머니는 선교사들에게 빨리 하나님을 믿는 남편감을 찾아주지않으면

점동이가 다른남자에게 시집갈 수 밖에 없다고 하소연했고

김점동을 부엌데기로 만들기 싫었던 선교사들이 후다닥 남편감을 찾게 되었다고한다. 

로제타 홀

그리고 김점동과 같이 일하던 의사 러제타 홀이 박유산이라는 청년이 있다며 소개시켜주었음.

박유산은 김점동처럼 기독교를 믿고 세례받은 사람이었는데 로제타 홀이

'하나님을 섬기는 여자가 좋겠느냐, 바느질 잘하고 음식 잘하는 신부가 좋겠느냐' 묻자

박유산은 하나님을 섬기는 여자가 좋다고 말해 남편감으로 낙점된 것이었다.

김점동네 집안에서는 박유산의 신분이 자기집안보다 떨어진다고 생각해서 못마땅해 했지만

당시 아내가 공부하는 걸 허락해 줄 남자는 흔치 않아서 결국 둘은 혼인하게 되었다.

김점동이 17살 박유산이 26살 때 일이었다

김점동과 박유산

그리고 둘은 미국으로 같이 떠나게 된다.

박유산 역시 공부에 뜻이 있었기에 함께 미국으로 갔지만

형편도 어려웠고 아내의 재능이 뛰어나고 열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고

자신은 공부를 포기, 농장일과 식당일을 하며 김점동을 뒷바라지 했다.

김정동은 1896년 10월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

1900년 6월 대학을 졸업하고 드디어 조선 최초의 여성의사가 되었다!

하지만 김점동은 크게 기뻐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가

남편 박유산이 김점동의 졸업시험을 3주 앞두고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김점동과 박유산, 로제타 홀, 로제타 홀의 아이들.

김점동은 혼인 후 미국식으로 남편의 성을 따르고 세례명 에스더를 자신의 이름으로 썼다.

박유산은 미국 볼티모어 로레인 파크 공동묘지에 묻혔고

현재도 '1868년 9월 21일 한국에서 태어나 1900년 4월 28일 볼티모어에서 사망했다'

는 글이 적힌 묘지가 남아있다고 한다.

조선으로 돌아온 김점동은 10개월 동안 홀로 3000명이 넘는 환자들을 진료했고,

황해도와 평안도를 돌아다니며 진료봉사활동과 위생 계몽 강연들, 로제타 홀이 세운 맹아학교와 간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이로 인해 공로를 인정받아 고종으로부터 은메달을 수여받았다.

처음에는 여성의사를 믿지 못하던 사람들도 김점동이 수술로 환자를 치료하는 모습을 보고

귀신이 재주를 피우는 것 같다면서 점점 믿게 되었다고.

또 인공관을 이용해 방광질 누관 폐쇄수술을 집도하는 등 의료적인 성과를 내기도 하였으나

조선에 돌아온 후 너무 과로한 탓인지 남편과 똑같이 폐결핵에 걸리고 말았고

결국 1910년 4월 13일에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로제타 홀의 아들인 셔우드 홀은 김점동의 죽음을 크게 슬퍼해서

결핵전문의사가 되어 한국에 결핵요양소를 세우고 결핵퇴치활동에 크게 힘썼고 1932년에 한국최초로

크리스마스 씰을 도입했다.

하지만 1940년 스파이 혐의로 일본 헌병에게 잡혀서 추방당했다.

 

로제타 홀은 자신의 일기에 김점동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그는 날마다 나에게 새로운 인생을 배우게 한다"

출처 : 소울드레서 - 다음카페

 

알려지지 않은 여성위인 알아가기. 잊지 않기.

그리고 더 많이 많이 알려졌으면.

문제시 삭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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